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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여인 미쑈(31·애칭).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11월 어느 교회에서였다. 그녀는 김장 나눔 행사에 경기도 안산이주민센터 대표로 참석했다. 세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찾았었다. 지난 반세기 내전으로 540여만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 콩고. 그녀가 한국으로 온 지도 올해로 7년째다. 지난 5일 오후 3시 시흥시 정왕동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다세대 주택가 한 건물 2층이 그녀가 사는 집이다. 1층 ‘성인용품점’ 간판이 거슬린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두 아이가 뛰어나왔다. 첫째가 브라이언, 둘째가 제이든. 16개월 된 제이든은 엉거주춤 서 있다가 품에 안겨 왔다. 훌쩍 큰 브라이언(5)은 한국말로 인사했다. 남편 독따(38·애칭)는 안방에서 콩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온 가족이 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휴식을 즐기는 시간이다. 미쑈는 소란스러운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곤 테이블이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벽에는 교회 달력과 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이 걸려 있다.

“콩고에서 전통 결혼식을 올렸고 한국에 와서 다시 교회 결혼식을 올렸어요.” 둘은 대학 때 만났다. 미쑈는 콩고의 프로테스탄트 대학에서 법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독따는 지질학을 공부했다. 둘은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독따가 중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훈남’인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연기도 했다. 엑스트라였지만 수입이 짭짤했다.

독따는 유학시절 반테러리즘 영화에서 군인 역을 맡았다. 귀국길. 공항에서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군복 차림의 사진을 깜빡 가방에 넣어 온 것이다. 콩고에서는 군복을 입거나 군 관련 물품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철창행이다. 독따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혔고, 그와 관련된 사람은 죄다 붙잡히거나 도망자 신세가 됐다. 미쑈도 마찬가지였다.

미쑈는 남편을 풀어달라고 신부인 삼촌에게 부탁했다. 삼촌은 성직자 신분으로 감옥을 드나들 수 있었다. 감옥을 탈출한 독따는 중국으로 피신했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에선 한국 비자를 발급 받기가 수월했다. 미쑈도 이듬해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가족은 전부 콩고에 있다. 그녀의 고향은 수도 킨샤사. 반군과 정부군의 오랜 전쟁으로 살인과 강간, 약탈이 난무하는 도시다. 가족만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언니와 오빠들. 일부다처제 사회라 가족 수를 “many(많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돌아가신 엄마 아빠에게 가장 사랑 받았던 막내딸이었다. 반군은 곧잘 가족들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여자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군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군인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재빨리 지붕과 천장 사이에 난 틈으로 숨었어요. 걸리면 그 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하거든요.”

미쑈는 종종 콩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한다. 생사 여부가 첫 번째 질문이다. 최근에는 반군이 동부로 이동해 고비를 넘겼다는 가족들이다. 매일 전쟁이 터진다 해도 고향은 그리운 곳이다.

고향 얘기에 미쑈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Oui Oui(그럼요 그럼요), seven years(7년이라고요.) I miss my family. (가족이 그립죠).”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의 언어는 불어다. 미쑈는 영어와 불어를 간간히 섞어 말했다.

한국에서의 삶도 서글프다. “우리는 난민이에요.” 하지만 난민이 아니다. 법무부에서 난민 신청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해야 먹고 살 텐데, 난민 자격도 주어지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난민은 불법 체류자들처럼 몰래 숨어서 일을 한다. 대학을 나온 독따도 가구 공장,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을 해왔다. 법적으로 노동행위는 일절 금지돼 있다. 지난 정권 때는 그나마 난민들의 취업을 눈감아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정권에선 상황이 다르다. 불시 단속에 걸리는 날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외국인보호소에 보내진다. 가장이 잡혀가면 가족의 생계는 막막해진다. 이런 이유로 미쑈도 아이들을 안산이주민센터 부설 ‘코시안의 집’에 맡겨 놓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소 생계 유지에 관한 정부 지원도 물론 없다. 이들은 차별받기 전 ‘배제’돼 있다. 미쑈는 아이를 낳을 때도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야 했다. 두 아이는 지금 국적도 없다. 예방접종도 제대로 못했다. 건강보험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기에 아플 수도 없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국적 없는 아이들을 받아 줄 학교는 없다.

미쑈의 가장 큰 고민거리도 교육이다. “초등학교는 공짜라지만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우리 아이는 한국말을 잘하는데 엄마인 저는 한국말을 못하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요. 또 나중에 아이의 공부를 도와줄 수도 없을 테고요….” 두 아이가 커갈수록 미쑈의 마음은 무거워진다고 했다. 코시안의 집에 다니는 브라이언은 계속 엄마에게 한국말로 질문했고, 미쑈는 불어로 답했다.

기댈 곳은 교회, 비정부기구(NGO) 단체뿐이다. 미쑈는 광명시 철산동 개명교회(담임목사 박태양)와 기독교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 이주여성의 자립을 돕는 ‘에코팜므’ 등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물질 후원도 후원이지만 무엇보다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어 고맙다는 미쑈. 이날도 에코팜므 박진숙 대표는 미쑈의 한국어 선생님이자 친구로 일산에서 시흥까지 달려와 줬다. 박 대표는 불어 통역을 도와줬다. “아휴 제가 감사하죠.” 박 대표에게서 돌아온 말이다.

처지가 같은 난민 가정도 버팀목이다. 미쑈네 인근에 사는 콩고 난민 가정은 5가정. 난민인권센터가 행정정보 공개를 청구해 얻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8월말 난민 신청을 낸 콩고인은 94명이다. 이들은 콩고 난민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정기 모임을 갖고 정보를 교류한다고 했다.

꿈을 물었다.

미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다시 물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나님 덕분입니다. 열심히 믿어야 되고 아이들 잘 돌봐야 되고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이 있기에 울지 않는다고 했다.

제이든은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쳤다. 요구르트 껍질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결국 엄마한테 들켜 호되게 야단맞는다. 아기들은 어쩜 다 그렇게 비슷할까.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제이든은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제이든을 한 번 더 꼭 안아줬다. 미쑈네 집 현관문을 나서면서 나는 제안했다. “우리 친구해요!” 서로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

■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 소속,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을 의미한다. 난민은 난민의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 때 난민에 대한 보호 책임은 난민 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한 나라, 국제기구, 시민사회로 넘어간다.

우리나라는 1992년 12월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고 94년 출입국관리법에 난민관련 규정을 신설했다. 아시아에선 한국 일본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동티모르가 협약에 가입해 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난민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국가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난민이 보호받기는 쉽지 않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2010년 8월말 기준 한국에서 난민지위인정을 신청한 2708명 중 21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인구 100만명 당 2명 꼴로 난민을 보호하는 셈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인 인구 1000명당 2명에 크게 못 미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난민은 1000만명에 이르며 비호신청자나 무국적자 등까지 포함하면 보호가 필요한 인구는 3200만명에 이른다.

글 이경선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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