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진 기자>             "우리 곁으로 피신 온 난민들이 울고 있어요"

 

난민인권교육매뉴얼 낸 에코팜므 박진숙 대표
"병원·은행·관공서도 난민에 대해 잘 몰라
사회적 지위 높은 난민 많은데 사회가 너무 방치" 
  • 이주여성 지원단체 에코팜므의 박진숙 대표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사무실에서 최근 발간한'난민 인권 교육 매뉴얼'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국내 난민신청자가 4월 4,500명에 육박했는데, 난민에 대한 이해는 바닥이에요. 한국에도 난민이 있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는다니까요."

     이주여성 지원단체 에코팜므의 박진숙(38·여) 대표는 국내 난민 인권 증진에 팔을 걷고 나섰다. 난민은 본국에서의 인종·종교·정치적 박해를 피해 타국에서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 우리나라도 난민 인정신청을 받기 시작한 지 9년째지만 난민 인정자는 4월 기준 신청자의 6%인 280명에 불과하다. 그가 최근 관련 기관과 단체에 배포한 난민인권교육매뉴얼을 보면 난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빚어지는 인권침해가 적지 않다.

 


     난민 인정 심사부터 벽이 높다. 박 대표는 "아프리카 콩고 출신의 한 신청자는 모국어인 프랑스어 통역자가 면담 도중 사전을 펴 단어를 찾는 등 말이 서툴러 난민 인정이 불허됐다며 이의 제기 소송을 내기도 했다"며 "신청자의 진술이 중요한 난민 인정 기준인데도 적절한 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얀마, 몽골, 방글라데시 줌머족 출신 등 소수언어 민족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2월 말 공포된 난민법 개정안은 이 같은 폐해를 방지하도록 난민 심사시 녹음과 녹화, 신청자가 신뢰하는 사람의 동석 등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시행되는 것은 내년 7월부터다.

     우여곡절 끝에 난민 인정을 받아도 법에 명시된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기는 쉽지 않다. 난민 인정자에게 발급되는 'F-2-2'비자를 들고 일자리를 구하러 가면 생소한 공장주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발급되는 D, E 비자를 갖고 오라"며 문전박대하기 십상이다.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돼 있는데도 난민 지위에 무지한 관공서, 은행 직원들에게 거절당한다. 난민 인정자들에게는 여권 대신 여행증명서가 발급된다는 사실을 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이 몰라 출국을 제지하는 경우도 있다.

     박 대표는 "밤중에 한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아픈 아이를 당장 입원시켜야 하는데 병원에서 한국인 보증인을 찾아오라고 한다'고 전화해 달려간 적도 있다"며 "국내 난민 중에는 이런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 협력사업 지원금으로 난민인권교육매뉴얼을 제작 배포한 데 이어 앞으로 난민 문제를 통합 지원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난민콜119'(가제) 구축, 난민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웹툰 제작 등 난민 인권 활동을 적극 추진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난민은 본국에서 사회적 지위,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인 경우가 많다"며 "국내에서 잘 자리잡도록 도우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인데 사회가 너무 방치하는 것 아니냐"며 난민 인권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 해피투데이는 (주)혜인식품-네네키친에서 발행하는 문화매거진입니다.

 

 

 우리 에코팜므가 월간 해피투데이 5월호에 실렸어요. <본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에코팜므 매자에 들어서자 이국적인 색채의 일러스트 엽서와 아프리카풍의 수공예품이 가득하다. ....중략...... 에코팜므는 낯선 땅에서 차별받는 난민이주여성들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다. 다양한 사연으로 본국에서 도피한 난민 여성들은 물론,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이주 여성을 위한 상담, 교육, 문화적 역량발굴프로젝트를 실시한다. 박진숙 대표가 에코팜므를 열게 된 계기는 2007년 4월, 프랑스어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우연히 콩고 난민여성 4명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일은 가정주부였던 그녀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쨰 바꿔 놓았다. ..중략... 이후 우연히 캐나다의 다문화프로그램연수를 가게 된 박 대표는 이주 여성들이 그린 엽서를 판매하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 만난 콩고 여성들을 떠올렸다. 이를 계기로 2008년, 미술치료가 중심이된 다문화 공방을 거쳐 이듬해, 난민 여성들의 작품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에코팜므'를 설립했다. ...중략...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 경제를 지원하는 여성이라는 뜻에 걸맞게 이주여성들이 친환경적인 재료를 이용해 만든 물건을 판매한다. 수익의 60~70%는 일주일 내에 이주여성들에게 지급된다. (79쪽) 

에코팜므가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이주여성 작가양성 프로젝트'. 한 명의 멘토작가와 한 명의 멘티 이주여성이 만나 일대일로 공예를 배운다. ...중략.... 본인이 가진 재능을 토대로, 이주여성 국가의 분위기가 나도록 작품을 변형시켜 이주여성들에게 가르친다. 이외에도 에코팜므에서는 아프리카 음악공연, 한국어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중략.... 에코팜므는 여타 NGO단체들과는 달리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해 정부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운영된다. 박진숙 대표는 에코팜므를 이끌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이주여성들과 마음을 맞춰 나가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중략.... 에코팜므는 단순히 이주여성의 생활을 돕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동반자에 가갑다. (80쪽)

 

UN난민기구가 난민협약을 체결한 지 60년이 넘었다. 하지만 난민 신청자가 100명을 넘은 2001년에야 최초로, 단 한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을 만큼 우리 사회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 선진국에 비해 난민정책도 미비해 짧게는 2~3년, 길게는 5~6년이 걸리는 심사 기간 동안 그들은 취업조차 금지된다. 기본적인 생활권도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난민은 스파이로 몰리거나, 반정부 시위를 하는 등 개인적인 박해 사유가 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박해사유를 정확히 증명할 수 없다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실제로 에코팜므를 찾은 난민 여성들은 콩고공화국, 라이베리아, 아이보리코스트, 나이지리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한국으로 도피해 공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중략.....요즘 박진숙 대표는 여성 난민자녀가 문화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에도 집중한다.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온 아이들이 문화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중략.... 또 이주여성들의 작품을 상품화한 라꽁뜨(La Conte, 이야기)라는 브랜드를 출시할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에코팜므가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일까? "이주여성, 난민이라고 하면 위장신분, 희생자 같은 안 좋은 이미지가 많잖아요. 에코팜므에서 활동하는 전속 작가들이 꾸준히 만들어 낸 문화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주여성의 긍정저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요." 소외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과 무관심이 공존한다. 에코팜므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동정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보폭을 맞춰 함께 걸어 나가는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에코팜므가 앞으로 나아갈 발자취가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81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법률 지원으로 소송 돕고, 재능 지원으로 자립 기틀 마련

켜쥔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돌이켜보니, 모든 순간이 마치 예정된 일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머물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난민(refugee,難民)'들에게 희망을 전한 지 벌써 7년. 만남은 용기를, 나눔은 행복을 가져다줬다. 김종철(42), 박진숙(39)씨 부부는 맘속에 차곡차곡 담아온 인연의 끈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낯선 손님들을 집으로 계속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몸집도 크고,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죠. 알고 보니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탈출한 난민들이었어요. 식구가 자꾸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입양을 고민할 정도였으니까요."

난민에게 희망을 전하는 김종철, 박진숙씨 부부의 모습 뒤로,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을 위해 멘토를 자청한 미술가의 재능기부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전 세계 난민 수는 총 1050만 명(2009년 UN난민기구 통계)으로, 그 중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난민신청자는 3300명(2010년 6월 말 기준)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들은 250명에 불과하다. 난민 인정 기준이 까다롭고, 법에 명시된 처리 기간이 없어 절차가 장기화됐기 때문이다. '공익 변호사' 김종철씨가 이들에게 눈을 돌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탈북자·결혼이주여성 등 이주민의 권리옹호와 소송 절차를 돕는 중에 우리 사회의 절대적 약자는 바로 난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들이 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2~3년 걸리고, 소송까지 갈 경우 5년 이상 소요됩니다.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 외에 생계를 위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합니다. 당장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데, 일자리는 꿈도 못 꾸죠. 취업허가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받을 수 있거든요."

머물 집도, 일할 곳도, 함께할 가족도 없는 난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인종·종교·정치·사상 등의 박해를 피해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차별과 편견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난민 지위를 획득해놓고, 상처를 안고 떠나는 이들이 생겨났다. 난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 이에 김씨는 '한글 교실'을 개설해 난민들과 소통의 장을 열었고, 아내 박진숙씨는 한글 교사를 맡았다.

"한글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난민으로 생활하며 느낀 설움과 아픔이 소통을 막진 않을까 염려도 됐고요. 하지만 첫 수업 날, 교실에 앉아있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고 제 생각이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

한 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 왕복 네 시간을 달려왔다. 그런데도 결석은 물론 지각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숙제도 빠짐없이 해왔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열정과 노력에 박씨는 감동을 받았다.

"소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분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정부를 위해 일하다가 스파이로 몰려 탈출한 이야기, 밀림 속에서 7년을 숨어 지내다가 극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이야기 등 그 과정에서 겪은 인종적, 성적 차별과 고통이 말도 못했어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분들의 용기 있는 삶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력자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옹호자로 제 역할이 바뀌었죠."

난민 중에는 자국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거나,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온 전문 인력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에겐 저임금 단순 노동 외의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글 교실을 진행하면서 난민들이 가진 재능과 열정을 본 박씨는 이들의 자기계발과 전문성 향상을 돕고 싶었다.

"2007년 말, 캐나다 이주민 월례회의에서 본 그림과 엽서가 모티브가 됐어요. 아프리카 특유의 색감이 돋보이는 유화를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돌아오자마자 난민 여성분들에게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올려놓고 베끼는 수준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 속에 풍부한 감성과 색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이 만든 핸드메이드 도예 접시.
여성가족부의 다문화공방사업 지원금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한 해에 40번 이상 전시회를 열면서 전문성을 더해갔다. 그리고 2009년 5월, 박씨는 이주 여성의 치유와 성장, 자립을 목표로 내건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를 설립했다. 지금은 그림·엽서뿐 아니라 문화 콘텐츠 제작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난민 여성이 직접 읽어주는 아프리카 동화, 젬베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주 여성 작가 양성 프로젝트'도 있다. 경력 단절 여성들이 이주 여성들에게 미술 강의를 재능 기부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아내의 적극적인 모습에 김씨 역시 용기를 냈다. 그동안 법무법인과 난민 지원 NGO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난 2011년 1월, 이주자의 권리 옹호·소송·법률교육·입법운동을 위한 공익법센터 '어필'을 설립했다. 1년 동안 보인 성과도 놀랍다. 콩고·케냐·에티오피아 등 4건의 난민 사건에서 승소를 했고, UN 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이주아동구금에 대한 NGO리포트' 내용이 권고에 직접 반영되기도 했다. 지난 2011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난민법 역시 '어필'에서 초안 작성과 입법 활동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난민 인정의 가장 중요한 증거가 진술인데, 전문 통역인 없이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난민신청자를 기간의 제한 없이 구금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거든요. 하지만 난민의 삶을 공감하고 옹호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콩고 난민 여성 한 분이 급성 폐렴으로 입원했는데, SNS기부에 참여한 분들 덕분에 수술비 전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김씨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에코팜므가 있어 든든합니다. 에코 팜므가 소송 이후 난민들의 케어와 전문 인력 양성을 책임지니, 저는 난민 소송과 권리 옹호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에 박씨가 "우리는 경쟁관계"라며 말을 이었다. "서로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몰래 따라하거나, 상대방이 실패한 방법은 실행 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있어요. 난민이 차별받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응원해주세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서로의 비전을 보완하는 두 사람. 한 발 한 발, 이들이 함께 만들어갈 희망의 발자국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아줌마의 꿈! 다문화의 힘! 에코팜므에서 열매 맺다


현재 이주여성들은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 여성회관 등에서 제공하는 취업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취업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주여성들의 노력과 열정은 대단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주여성들의 열의에 비해 정작 현실은 따라주지 못한다. 특히 제3세계 이주여성들은 원하는 직종의 취업 문턱을 넘기가 수월하지 않다. 모국에서의 경력이나 타고난 재능, 당사자의 꿈은 묻힌 채, 대부분 공장노동자로 획일화 되어 있다. 이처럼 난민과 결혼이민, 망명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 사회에 편입된 이주여성들을 치유하고, 진정한 다문화를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며, 이 땅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설립된 민간 기업이 ‘에코팜므’이다.

차별과 약자 없는 생태적인 여성사업을 기획하다
프랑스어인 에코팜므는 '생태여성(Eco+Femme)'이라는 뜻. 그런데 에코팜므의 박진숙 대표가 이러한 이름을 지은 데는 이유가 있다. 소외받고 차별받는 이주여성들이 그들의 꿈과 삶을 맘껏 펼치면서 생태적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실제로 박진숙 대표는 불어를 전공했고, 불어권 아프리카 난민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에코팜므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한글을 가르치다 에코팜므라는 기업을 만들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박진숙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이렇다.
2007년 4월, 불어를 전공한 박진숙 대표는 국제난민 지원단체인 ‘피난처’ 주말학교에서 불어권 아프리카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에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 대표는 경제나 문화적으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난민 여성의 현실을 보게 된다. 국적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다 보니 당연히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주말학교가 다문화시범학교로 지정되면서 박 대표는 캐나다의 다문화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는 단기 연수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박 대표는 이주민 여성들에 대한 일정적인 처우나 그녀들이 만든 공예품 등이 높은 값에 팔린다는 사실을 접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한국에 돌아온 박 대표는 그때부터 이주민 여성들을 설득했다. 그들의 모국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그림이나 디자인 수공예품을 만들어서 다른 삶을 살아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리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의 사업제안서가 여성부의 지원대상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주민 여성들이 밀집한 경기도 안산에 공방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쳤다. 그러자 소극적인 이주민 여성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

원문보기:
http://nara.sbc.or.kr/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 ①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 박진숙 대표
“여력이 된다면 자원활동 하는 것을 추천해요.
저 역시 일을 시작하면서 부부 싸움도 줄고 삶에 활력이 생겼거든요”


이주 여성의 치유와 성장, 자립을 목표로 내건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에서는말뿐이 아닌 진정한 다문화를 접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이국적인 풍광이 깃든 아트 상품과 수공예품을 만드는 한편 문화 영역으로 확장 중이다. 이주 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치다가 그들을 위한 사회적 기업까지 설립한 박진숙 대표는 육아와 학업으로 단절된 커리어를 멋지게 다시 쌓아올린 열혈 여성이다.


원문보기:
석사학위 두 개, 두 명의 자녀, 창업 3년 차, 박사과정과 일 병행. 사실 박진숙(37) 대표를 일반적인 경력 단절 여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경력 단절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우울증과 무기력함은 그도 마찬가지로 겪었다. ‘많이 배웠어도 쓸 데 없다’라는 편견에 멋지게 반기를 들고 인생의 2막을 연 그의 도전은, 다른 경력 단절 여성을 돕는 일로 발전했기에 더 의미가 크다.

에코팜므는 다문화 가정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그들의 이주 경로는 다양하다. 콩고 여성들은 내전으로 도피한 난민이고, 아시아 여성들은 결혼으로 인한 이주가 많다. 에코팜므는 이들 이주 여성을 위한 상담과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예술적 소양을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작가 되기’를 지원하며 경제적 역량뿐만 아니라 문화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수공예 작가 등과 이주 여성을 결연해 단순한 작업에서부터 창의적 작품 활동까지 손을 내밀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1109061703411&pt=nv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사진 너무 예쁘게 잘나왔지요?
엘라서울은 엘르에서 나온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인데요, 이번에 엘라서울에서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취재 했는데 거기에 마리도 9명의 외국인들 중 하나로 당당히 잡지에 나왔답니다~~ 
에코팜므의 작가로서 한국에서의 힘든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 마리,
이제는 잡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멋지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서 뮈리엘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시선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자유롭지 못한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럼 뮈리엘을 비롯한 다른 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거듭나는 그날까지,
모두들 많이 많이 응원해 주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현대 해상 사보 5월호에 에코팜므가 인터뷰 되었어요 ^^


110506 한우리 컬러하트
View more presentations from 팜므 에코.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

- 기사 원문 -

콩고민주공화국 여인 미쑈(31·애칭).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11월 어느 교회에서였다. 그녀는 김장 나눔 행사에 경기도 안산이주민센터 대표로 참석했다. 세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찾았었다. 지난 반세기 내전으로 540여만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 콩고. 그녀가 한국으로 온 지도 올해로 7년째다. 지난 5일 오후 3시 시흥시 정왕동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다세대 주택가 한 건물 2층이 그녀가 사는 집이다. 1층 ‘성인용품점’ 간판이 거슬린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두 아이가 뛰어나왔다. 첫째가 브라이언, 둘째가 제이든. 16개월 된 제이든은 엉거주춤 서 있다가 품에 안겨 왔다. 훌쩍 큰 브라이언(5)은 한국말로 인사했다. 남편 독따(38·애칭)는 안방에서 콩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온 가족이 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휴식을 즐기는 시간이다. 미쑈는 소란스러운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곤 테이블이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벽에는 교회 달력과 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이 걸려 있다.

“콩고에서 전통 결혼식을 올렸고 한국에 와서 다시 교회 결혼식을 올렸어요.” 둘은 대학 때 만났다. 미쑈는 콩고의 프로테스탄트 대학에서 법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독따는 지질학을 공부했다. 둘은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독따가 중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훈남’인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연기도 했다. 엑스트라였지만 수입이 짭짤했다.

독따는 유학시절 반테러리즘 영화에서 군인 역을 맡았다. 귀국길. 공항에서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군복 차림의 사진을 깜빡 가방에 넣어 온 것이다. 콩고에서는 군복을 입거나 군 관련 물품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철창행이다. 독따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혔고, 그와 관련된 사람은 죄다 붙잡히거나 도망자 신세가 됐다. 미쑈도 마찬가지였다.

미쑈는 남편을 풀어달라고 신부인 삼촌에게 부탁했다. 삼촌은 성직자 신분으로 감옥을 드나들 수 있었다. 감옥을 탈출한 독따는 중국으로 피신했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에선 한국 비자를 발급 받기가 수월했다. 미쑈도 이듬해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가족은 전부 콩고에 있다. 그녀의 고향은 수도 킨샤사. 반군과 정부군의 오랜 전쟁으로 살인과 강간, 약탈이 난무하는 도시다. 가족만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언니와 오빠들. 일부다처제 사회라 가족 수를 “many(많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돌아가신 엄마 아빠에게 가장 사랑 받았던 막내딸이었다. 반군은 곧잘 가족들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여자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군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군인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재빨리 지붕과 천장 사이에 난 틈으로 숨었어요. 걸리면 그 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하거든요.”

미쑈는 종종 콩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한다. 생사 여부가 첫 번째 질문이다. 최근에는 반군이 동부로 이동해 고비를 넘겼다는 가족들이다. 매일 전쟁이 터진다 해도 고향은 그리운 곳이다.

고향 얘기에 미쑈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Oui Oui(그럼요 그럼요), seven years(7년이라고요.) I miss my family. (가족이 그립죠).”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의 언어는 불어다. 미쑈는 영어와 불어를 간간히 섞어 말했다.

한국에서의 삶도 서글프다. “우리는 난민이에요.” 하지만 난민이 아니다. 법무부에서 난민 신청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해야 먹고 살 텐데, 난민 자격도 주어지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난민은 불법 체류자들처럼 몰래 숨어서 일을 한다. 대학을 나온 독따도 가구 공장,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을 해왔다. 법적으로 노동행위는 일절 금지돼 있다. 지난 정권 때는 그나마 난민들의 취업을 눈감아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정권에선 상황이 다르다. 불시 단속에 걸리는 날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외국인보호소에 보내진다. 가장이 잡혀가면 가족의 생계는 막막해진다. 이런 이유로 미쑈도 아이들을 안산이주민센터 부설 ‘코시안의 집’에 맡겨 놓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소 생계 유지에 관한 정부 지원도 물론 없다. 이들은 차별받기 전 ‘배제’돼 있다. 미쑈는 아이를 낳을 때도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야 했다. 두 아이는 지금 국적도 없다. 예방접종도 제대로 못했다. 건강보험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기에 아플 수도 없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국적 없는 아이들을 받아 줄 학교는 없다.

미쑈의 가장 큰 고민거리도 교육이다. “초등학교는 공짜라지만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우리 아이는 한국말을 잘하는데 엄마인 저는 한국말을 못하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요. 또 나중에 아이의 공부를 도와줄 수도 없을 테고요….” 두 아이가 커갈수록 미쑈의 마음은 무거워진다고 했다. 코시안의 집에 다니는 브라이언은 계속 엄마에게 한국말로 질문했고, 미쑈는 불어로 답했다.

기댈 곳은 교회, 비정부기구(NGO) 단체뿐이다. 미쑈는 광명시 철산동 개명교회(담임목사 박태양)와 기독교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 이주여성의 자립을 돕는 ‘에코팜므’ 등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물질 후원도 후원이지만 무엇보다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어 고맙다는 미쑈. 이날도 에코팜므 박진숙 대표는 미쑈의 한국어 선생님이자 친구로 일산에서 시흥까지 달려와 줬다. 박 대표는 불어 통역을 도와줬다. “아휴 제가 감사하죠.” 박 대표에게서 돌아온 말이다.

처지가 같은 난민 가정도 버팀목이다. 미쑈네 인근에 사는 콩고 난민 가정은 5가정. 난민인권센터가 행정정보 공개를 청구해 얻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8월말 난민 신청을 낸 콩고인은 94명이다. 이들은 콩고 난민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정기 모임을 갖고 정보를 교류한다고 했다.

꿈을 물었다.

미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다시 물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나님 덕분입니다. 열심히 믿어야 되고 아이들 잘 돌봐야 되고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이 있기에 울지 않는다고 했다.

제이든은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쳤다. 요구르트 껍질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결국 엄마한테 들켜 호되게 야단맞는다. 아기들은 어쩜 다 그렇게 비슷할까.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제이든은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제이든을 한 번 더 꼭 안아줬다. 미쑈네 집 현관문을 나서면서 나는 제안했다. “우리 친구해요!” 서로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

■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 소속,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을 의미한다. 난민은 난민의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 때 난민에 대한 보호 책임은 난민 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한 나라, 국제기구, 시민사회로 넘어간다.

우리나라는 1992년 12월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했고 94년 출입국관리법에 난민관련 규정을 신설했다. 아시아에선 한국 일본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동티모르가 협약에 가입해 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난민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국가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난민이 보호받기는 쉽지 않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2010년 8월말 기준 한국에서 난민지위인정을 신청한 2708명 중 21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인구 100만명 당 2명 꼴로 난민을 보호하는 셈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인 인구 1000명당 2명에 크게 못 미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난민은 1000만명에 이르며 비호신청자나 무국적자 등까지 포함하면 보호가 필요한 인구는 3200만명에 이른다.

글 이경선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bokyung@kmib.co.kr

신고
Posted by 에코팜므 에코팜므